살며 배우며 사랑하며 2007. 10. 27. 11:30

모네는 정원을 모티브로 한 그림을 43년간 무려 350여 점이나 제작했다고 한다.
그 중 수련을 모티브로 삼은 것은 200여 점 정도 남겼으니

연못 위의 수련에 얼마나 심취했었는지 가늠할 수 있다.

 

그는 외부와 자신을 차단한 채 지베르니 정원에서

자연을 벗삼아 그의 예술세계를 추구해 갔다.
강의 지류를 끌어와 조성한 정원을 가꾸며

작업을 시작하기 전이면 수면과 꽃을 보며 명상하고,
그림을 그리는 데 방해가 되는 모든 것들을 정리했다고 한다.

전람회에 출품된 수련 그림들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 속에서 하루하루 변모하는 사물의 색감과 느낌이 다 다른 것을 확인하게 된다.
정말 그렇다. 눈 깜짝할 사이에 자연의 생명체들은 모습을 달리한다.
새벽과 아침, 정오, 저녁과 밤 사이에도 속절없이 자연물들은 변화한다.
새벽 여명에 장밋빛과 진주빛, 그리고 우유빛으로 반짝이고,
낮에는 작열하는 듯한 열기를 내뿜는가 하면 해질 무렵에는 자색이 낀 푸르름에 잠긴다.
하루의 시간과 햇살에 따라 ‘꿈결 같은 광선의 환상곡’(李逸)을 읊어대는 대상세계를 옮긴다.

그의 예술은 겉모습의 변신만이 아니라

생명의 신비까지 포함한 존재의 아름다움을 보여 준다.
꽃들이 그렇게 아름답지 않았다면 똑같은 모티브의 형상에

그토록 집요하게 매달릴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가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정원과 수련을 버리지 않았던 것은

얄궂은 이데올로기의 신봉 때문이 아니라
자연이 안겨 주는 싱그러움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의 그림들은 사물에 주목하지 않는다.
빛과 바람 등의 자연적 요소에 내맡겨진 그 자체의 분위기를 모두 느낄 수 있게 한다.
귀스타브 제프루아의 표현처럼

 “태어나고 죽어가고 다시는 오지 않을 덧없는 순간의 감흥”을

모네만치 담아낸 사람은 아직 없다.
수련이라는 대상은 순간적인 인상의 환상에 묻히고 장식적인 표면으로 녹아든다.
가까이에서 보면 거친 붓자국으로 술렁이지만

몇 걸음 뒤로 물러나서야 비로소 대강의 윤곽이 포착된다.
뒷날 이러한 표현수법은 점점 더 농후해져 수련을 다룬 작품들은 마치 추상화에 가깝게 된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그의 작품을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언젠가 모네의 정원을 볼 수 있다면, 꽃들의 정원이라기보다는

색채의 정원이라고 해야 할 것 같은 그 정원에서…
결코 자연의 꽃이 아닌 하나의 배열된 꽃들, 그리고 훌륭하게 표현된 화가의 의도로
이를테면 색이 아닌 모든 것으로 비물질화시킨 꽃들을 보게 될 것같은 느낌이 든다.”

그의 작품은 잭슨 폴록을 필두로 하는 미국의 추상표현주의를 예고하고 있는 듯 하다.
사물의 비물질화를 시도한 추상회화를 모네는 일찍이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서성록(안동대 미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