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배우며 사랑하며 2008. 10. 12. 15:23

 


“사과에 대한 추억 하나 없는 사람 있을까요? 아마 평범하기 때문에 사랑받는 거 같습니다. ”
서양화가 윤병락(37)씨는 1년 6개월 만에 ‘사과 화가’로 이름이 알려졌다.

사과는 미술을 배우는 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그려봤음직한 흔한 소재이지만 그의 손을 거치면 특별한 사과로 거듭난다. 그의 작품 속 사과는 마치 실제 오브제처럼 선명하다.

특히 질감이 살아있어, 사과 상자를 위에서 직접 내려다보는 듯한 착각마저 일으킨다. 윤씨가 사과를 화폭에 담아내기 시작한 것은 2003년 말. 이전 작업은 주로 접시 위에 놓인 나뭇가지, 대추, 감 등 정물을 소재로 했지만 우연찮게 사과를 선택했다.

“어릴 적부터 좋아했던 사과가 의외로 작품 소재로 적합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때부터 사과의 양감뿐만 아니라 질감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애썼죠.”  

그는 캔버스 대신 한지를 택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사과의 질감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나무판 위에 삼합지 이상의 두꺼운 한지를 붙이고, 그 위에 유화물감으로 2, 3차례 덧칠을 한다. 이렇게 캔버스를 대신할 밑작업만 해도 꼬박 하루가 걸린다.

“평소엔 사과를 하루 10개 이상 먹어치울 정도로 사과를 좋아하는데 막상 작품 모델이 됐던 사과는 전혀 먹히지 않더라구요. 먹는 사과가 아니라 단지 정물로 보이기 때문이겠죠. 몇 상자씩 썩혀 버리는 일이 다반사예요.”

요즘엔 사과 궤짝을 구하기 힘들어, 고향에서 아버지가 궤짝을 직접 구해주신다. 작업실에서 사과를 깎기도 하고 궤짝을 옆으로 쏟기도 하면서 다양한 구도를 만들어낸다.

그의 작품엔 빠지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수건. 사과 궤짝 한쪽에 걸쳐져 있는 새하얀 수건은 노동의 땀과 노동의 신성함을 보여준다. “부모님이 고향에서 포도 농사를 짓고 계세요. 수입농산물에 밀려 힘겨워하는 농부의 모습을 직접 보면서 이를 조형적으로 나타내고 싶었어요.”

그는 지난해 광주 비엔날레, 프랑스 아트페어, 대만 아트페어, 한국 국제아트페어 등 여러 곳에서 숨가쁘게 작품을 발표해왔다. 그의 작품은 아이디어가 신선하고 재미있다는 점에서 호평받았다.

지난 4월 참석한 대만 국제예술전람회에서 그의 작품을 눈여겨본 대만의 한 화랑이 내년 봄 대만에서 초대전을 열기로 했다. 그 외에도 올 가을엔 싱가포르 아트페어와 화랑미술제 등에 참석할 예정이다.

이렇게 사과 작품으로 주목받는 것은 단순히 소재 덕만은 아니다. 그는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한 이듬해인 1995년, 최연소 나이로 고금미술연구회 선정작가가 됐을 만큼 탄탄한 실력도 갖추고 있다. 약 2년 단위로 꾸준히 작품 경향이 바뀌어 온 그에게서 앞으로 어떤 작품을 볼 수 있을까.

“당분간은 사과를 계속 그려나갈 겁니다. 이와 함께 고가구나 골동품 등 앤티크 분위기의 작품을 구상하고 있어요. 작품이란 게 늘 계획대로 되는 게 아니지만 제 작품을 통해 따뜻한 감성을 느끼길 바랄 뿐입니다. ”

최세정기자 beacon@i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