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회화사
일본문화는 동양의 문화이면서도 매우 특색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체로 일본문화는 외면적인 화려함보다는 내면적인 우아함과 아름다움을 희구하는 경향이 강하다.
「雅び(미야비: 그윽한 아취)」라든가, 「物の哀れ(모노노 아와레: 심오한 정취)」라든가, 「わび(와비: 고요한 정서)」, 「さび(사비: 옛스러운 운치)」따위 말로 표현되는 조화적 정취의 세계를 탐구하려는 일본인의 독자적인 미의식이 외래문명을 받아들여 소화해 가면서 전통문화로 융화시켜 특색이 있는 것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일본문화는 일본민족의 미의식과 더불어 異質 문화에 대해 유연했던 국민성이 외래문화에다 정신적인 뒷받침을 해 가면서 국풍화(國風化)해 왔다고 불 수 있겠다.
물론, 문화란 여러 가지 부문, 예컨대 학문, 종교, 예술을 총칭하는 것이며, 게다가 예술은 문예와 미술과 음악으로 나뉘어지므로 일본문화 전체를 개관해서 한마디로 잘라 말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적어도 위에서 말한 것은 造形문화에 있어서는 제대로 들어맞는다고 하겠다.
그런데, 근대에 들어와서부터 일본은 서구의 물질문명, 기계문명을 섭취하는데 급했던 나머지, 일본의 독자적인 내면적 美를 상실해 가는데 대해 너무나도 무감각해지고 있다는 반성의 소리가 도처에서 일고 있다.
그러므로, 현대 일본인이 만일 아무런 비판 없이 서구문명에 탐닉하고 있다면, 그것은 크게 반성을 해야 마땅한 일이며, 한편 옛부터 전해오는 순수한 일본 문화의 쇠퇴를 그저 맹목적으로 슬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역시 일본문화의 육성과정을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도대체 일본문화란 어떠한 것인가를 다시 한번 고찰해 볼 필요가 있겠다.
여하튼 현대 일본과 그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외래문화의 국풍화라는 커다란 특색을 지닌 그 발자취를 살펴 보아야 한다. 일본문화의 변천을 더듬어 보기 위해서는 편의상 일본 역사를 문화적인 관점에서 몇몇 시대로 구분해서 고찰하여야 할 것이다. 문화사적으로 보아서 일본 역사는 上代, 古代, 中世, 近世, 近代 등 5단계로 구분해 보는 것이 적당하다.
이렇게 구분된 각 시대의 문화는 어느 것이나 다른 시대의 문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색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각 시대의 문화 전반을 개관하는 일이란, 이 작은 책자를 가지고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므로, 여기서는 주로 조형문화의 면에서 그 5단계의 시대를 훑어보려고 한다.
일본에서 조형문화의 싹이 트기 시작한 上代라 하면, 그것은 기원전 7,000년 경이며, 이른바 繩文(죠오몽)식 토기가 쓰이던 시대를 말한다. 繩文식 토기라고 하는 것은, 새끼줄 무늬를 넣은 소박한 질그릇으로서 신석기문화로서는 아직 발달되지 못한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上代는 일본에 불교가 전래되던 7세기 무렵까지 계속되는데, 대륙에서 벼농사와 금속기가 전래된 야요이식 토기시대(기원전 4-3세기에서 기원 3-4세기까지) 라든가 고분의 유물을 중심으로 하는 고분시대(4세기)도 이에 포함되는 것이다. 즉 원시시대로부터 천황제 고대국가로서 일본이 통일될 무렵까지이다. 이 시대의 토기는 그 형태가 용도에 따라서 분화되었고, 무늬도 빗살무늬라든가 無紋이 되기도 하여 간소화해졌다. 이러한 야요이식 토기를 중심으로 하는 문화는 일본에 있어서 외래 문화의 효시였다고 한다.
그 다음을 잇는 古代는 불교문화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겠다. 물론 上代人들도 일찍이 대륙문화의 영향을 받고는 있었지만, 불교가 전해지고 그것이 국가의 보호를 받아서 융성해지자, 여기서 대륙적인 寺院 건축이나 佛像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예술의 황금시대가 나타난다.
이 무렵은 일본이 중국 대륙의 영향을 가장 강하게 받던 시대인데, 당시의 중국 대륙을 지배하고 있던 당은 중국의 역대 왕조중에서도 가장 異國문화를 많이 받아들이던 나라였던만큼 그 문화에는 이국적인 요소가 가득 차 있었으며, 따라서 일본은 간접적으로 당시의 세계문화를 섭취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 무렵의 서유럽에서는 동고오트 왕국이 멸망하고, 로마 교회는 교황권을 확립하여 그레고리 1세가 처음으로 교황이 되었으며, 런던에서는 센트포올 성당이 건립되는 등 특기할 만한 시대였다. 그리고 이 일본의 고대 불교문화 시대는 중국이나 조선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태도의 차이에 따라 「飛鳥(아스카): 6세기 후반∼7세기 전반)」, 「白鳳(하쿠호오: 7세기 후반∼8세기 초기)」, 「天平(텐표오: 대체로 8세기)」시대로 구분되고 있다.
이어서 도읍이 京都로 옮겨져 平安(헤이안)시대라고 일컬는 귀족 정치 시대가 시작되는데, 이 시대에 일본문화는 크게 변동했다. 平安시대의 前期, 약 100년이라는 세월은 아직도 唐문화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했음에 반하여, 平安후기-「藤原(후지와라)」시대(10세기∼12세기)에 와서는 10세기 초 당문화의 멸망에 호응하여, 일본은 중국문화에의 종속에서 탈피하고 일본의 美를 구현하는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었다.
이 무렵에는 귀족이 관료로서의 자각을 잃고, 실제적인 政務는 모두 하급 관리에게 맡겨 둔채 그들은 일반 국민과는 폐쇄된 생활 속에서 화조풍월(花鳥風月)의 풍류를 즐기는 데 전념했다. 그리하여 귀족들은 그와 같은 취미적인 생활 속에서 그들의 문화적 능력을 최대한으로 성숙시켜, 후세 사람들이 좀처럼 추종하지 못할 일본의 독자적인 문화를 낳았던 것이다.
당시는 원시사회 이래의 母系的 가족형태가 아직도 짙게 남아 있어서 여성의 남성에 대한 예속은 완전히 실현되지 않았고, 여성으로서의 莊園의 領主가 된 사례도 꽤 있었다. 경제적으로도 독립했고 문화적으로도 뛰어난 능력을 가진 여성들이 배출되고 있었는데, 그러한 시대환경 때문이었는지 「物の哀れ(모노노 아와레 : 사물에서 느끼는 애틋한 정감)」라는 미의식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시대의 문화가 약간의 여성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점에 그 특색이 있다.
이 시대에 대응하는 유럽의 발자취를 보면, 프랑크 왕국이 봉건제도를 성립시키던 바로 그 무렵이었고, 제도적으로는 그들의 한 시대를 앞서고 있었다. 종교사로는 그리이스 정교의 성립, 동서교회의 최종적 분열(1054) 등의 시기였다.
그러나 일본에서도 13세기 초에는 귀족지배에 대체하는 새로운 시대의 주역으로서의 무사계급에게 정치적 권력만이 아닌 문화적 주도권마저도 점차로 이양하지 않으면 안 될 시대를 맞았다. 무사는 원래 지방의 豪農 사이에서 일어난 신흥 세력이었는데, 그것은 고대 국가의 지배 계급을 대체하려는 혁명을 진행시키던 세력이었다.
여기서 고대 세력은 몰락하고 말았으며, 그에 대신하는 무가정치의 봉건사회, 즉 중세로 옮겨져 갔다. 이 무사들은 물론 고대국가를 단번에 무너뜨리지는 못하였고, 부득불 귀족들과의 타협을 하기에 이르렀으며 그들이 봉건제도를 확립하기까지에는 수백 년이 걸렸다. 무화면에서도 그와 마찬가지로 급격한 고전의 붕괴는 없었고, 12-13세기 대에는 쇠퇴해 가던 귀족문화와 신흥 서민문화나 武家문화와의 교류도 허용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예술문화의 개화에서는, 중국의 宋代문화, 특히 禪宗의 영향을 간과하지 못할 것이다. 신흥 무사계급의 문화는 이 선종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하지만 선종예술이 정작 무사계급의 문화로서의 주류를 이루는 데는 그후 14세기 南北朝시대를 거쳐서 「足利幕府(아시카가 바쿠후 : 足利武家의 정권)」가 京都에 수립되기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15세기에서 16세기 전반에 이르는 「室町(무로마치)」시대에는 선종문화가 종교적 성격을 탈피하여, 순전한 예술적 방향으로 세련되어 갔으며, 「五山(고산)문학 : 鎌倉(카마쿠라) 및 京都의 각 오대사(五大寺) 禪僧의 漢詩文」과 室町 수묵화가 그것을 대표한다. 그것이 차츰 정비되어 室町시대에 확립된 것이다. 각 오대사의 승려들은 幕府의 정치 외교의 고문이 되었고, 또 학예의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室町시대에도 말기(16세기)에 이르러서는 진정으로 일본인의 마음을 바탕으로 삼는 일본적 정취를 간직한 문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유럽에서 위대한 학자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발표하고, 미켈란젤로가 세상을 떠나던 무렵의 일이다.
시대는 다시 일변해서 지역마다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된 봉건 질서를 제도화하고 분산적으로 群起하던 여러 大名(다이묘오 : 넓은 영지를 가진 무사)위에 통일 정권을 수립한 「織田信長(오다노부나가)」, 「豊臣秀吉(토요토미 히데요시)」, 「德川家康(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세 영웅이 지배하는 시대가 왔다. 유럽에서는 봉건시대가 이미 붕괴의 시기에 접어들어, 국왕이 봉건 귀족의 정치 권력을 빼앗아, 유력한 상업자본의 지지를 얻어서 압도적인 정치 권력과 풍부한 경제력을 가지면서 관료제도와 상비군을 갖추는 등 절대주의 국가를 세우던 무렵이다.
이 시기의 일본을 정권의 소재에 따라 구분한다면, 織田信長, 豊臣秀吉 정권하의 16세기를 「安土·桃山(아즈치·모모야마)」시대, 德川씨가 정권을 장악한 17세기 이후 19세기까지를 「江戶(에도)」시대라고 부를 수 있다. 특히 安土·桃山시대에는 전대(前代)로부터의 분방한 공기가 여전히 흘러 있었고, 국제적으로는 세계 각국과의 교통·무역도 활발했으며, 진취의 기운이 강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에, 문화면에서도 발랄하고 호쾌한 특색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 무렵 문화의 역군은 새로운 시대의 지배자로 등장한 무장(武將)과, 그에 동조한 호상(豪商)들이었으며, 그들의 활달하고, 호방한 정신이 그대로 반영되어 이 시대의 문화는 스케일도 크고 힘차게 약동하는 것이었다. 즉 호장화려한 성곽문화가 그 대표적인 것이다. 한편 이 시대에는 유럽의 르네상스와도 비슷한 왕조문화에 대한 고대부흥적 경향이 엿보인다. 더우기 서도나 회화에서 고요하고 산뜻한 맛을 추구하는 일본적인 특질이 뚜렷이 나타나 있다.
이러한 桃山문화가 분화해서 모습을 바꾸어 가는 것이, 뒤따른 江戶시대(17세기 전반∼19세기)이다. 江戶시대 초기에는 아직도 桃山시대의 특색을 이어받고 있었는데, 봉건제도의 굳건한 확립과 더불어 새로이 江戶시대의 독자적인 무가(武家)문화가 형성됨에 따라서 예술면에 있어서는 무턱대고 형식화가 두드려졌으며, 유교내지는 武士道가 지닌 봉건 도덕의 율법이나 예식에 얽매인 나머지 내면적인 진정의 표출을 억제해야만 했던 무사는 결국 문예 발전에 기여할 수 없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하여 종전에는 문화면에서 한 번도 지도적인 입장에 서 보지 못했던 서민들이 처음으로 시대(時代)문화를 전적으로 지도하는 시대를 맞게 되어 「町人(쵸오닝 : 도시에서 상공업에 종사하는 서민 계층)」문화의 전성시대를 맞게 된다.
江戶시대에는 또한 중국의 明·淸문화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는 때였지만, 江戶시대 말기에 접어들어서는 완전히 이질적인 서양 문물의 도입으로 江戶문화가 근대화의 문을 여는 실마리를 찾게 했다. 그리하여, 明治(메이지)維新의 개막과 동시에 서양 문화의 급격한 유입은 일본을 근대국가의 일원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일본인은, 옛 繩文시대서부터 줄곧 외래문화의 영향을 받아 오면서 그것의 수용소화에 의한 국풍화를 이룩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문화를 육성해 왔다. 그 중에는 실로 각양각색의 세계문화의 색채를 띄게 하면서 그것을 변용하여 승화시켜 일본 고유의 문화로 만든 것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