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 그레코의 성 가족
< 성 가족 ,엘 그레코 (El Greco 1541?∼1614.4.7) >
서양미술사를 장식한 고전주의 시대의 작품 중에서
가장 현대적인 작품을 꼽으라면 미술사가들은 16세기 후반에 활약한 엘 그레코부터 찾는다.
최고의 기량을 가진 베니스화파에 속했지만, 절정기 무렵의 그의 화폭에 등장하는 인물과 풍경은
현대 추상회화에서 볼 수 있는 양식으로 심하게 일그러지거나 뒤틀려 있다.
그의 눈이 심한 난시였거나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어떤 시각적 장애에 시달렸을 것이라는 학설이 제기될 정도로
그의 화면은 16세기 때 이미 20세기 추상을 예고하며 심하게 왜곡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그는 스페인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스페인의 화가로 알려져 있다.
36세 때인 1577년에 정착하여 1614년 73세의 일기로 숨을 거둘 때까지 오래도록 살아왔던
스페인 마드리드 남쪽의 고도 ‘톨레도’의 모든 것은 엘 그레코로 통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그는 톨레도와 한몸으로 일체화되어 있다.
하지만 그는 스페인 출신이 아니라 크레타 섬에서 태어난 그리스인이다.
엘 그레코라는 이름 자체가 에스파냐어로 ‘그리스 사람’을 뜻한다.
그의 본명은 도메니코 테오토코풀로스였다.
도메니코는 중세 이래로 새로운 미술이라고는 전혀 발전시키지 못했던 고향 섬을 떠나 1566년 베니스로 건너왔다.
당시 크레타 섬은 베니스공화국 치하에 있었고,
마침 그의 형이 베니스공화국의 세리로 임명되었던 기회를 잡았던 것이다.
베니스에서 도메니코는 스승으로서의 티치아노와 틴토레토를 만난다.
그 두 대가의 작품에 순간적으로 매혹된 그는 자연적인 형태나 색채를 과감하게 무시해도 좋다는 배짱을 기른다.
그 배짱은 예술관이라기보다는 그의 신앙심에서 배양된 것인지도 모른다.
틴토레토와 마찬가지로 그는 아주 격정적이면서도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성서이야기를 딱딱한 양식의 마니에리즘으로 그려낼게 아니라
실제로 있는 일처럼 참신하고 감동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베니스는 이 도메니코의 그런 혁명적 의식전환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도 딱딱한 중세적 권위로 굳어 있었다.
그리하여 도메니코는 유럽의 한 구석인 스페인의 톨레도에 정착하여
그리스에서 온 사람으로서의 엘 그레코가 된다.
톨레도에서 엘 그레코는 정확하고 자연스러운 묘사를 귀찮게 요구하는 비평가들로부터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요컨대 톨레도에 와서 그의 작품은 현대화로 향해 해방되었고 그 자신은 자유를 만끽했다.
“크레타는 그에게 생명을 부여했고, 톨레도는 그에게 붓을 선사했다.”
톨레도의 시인이며 수도사였던 호르텐시오 파라비치노는 이렇게 말하였다.
모든 선지자들은 고향에서 박대를 받는다고 했던가.
크레타와 베니스에서 신통찮은 대접을 받았던 도미니코는
톨레도에 오자마자 최고의 평가를 받아 위대한 그리스인이 된다.
그리하여 먼 타향인 톨레도는 엘 그레코 예술의 진정한 고향으로 기능했다.
다른 곳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톨레도의 신비스러운 종교적 정열은
그에게 400년 후를 내다볼 수 있는 심미안을 주었던 것이다.
모든 미술작품에 ‘정확성’이라는 동일한 기준을 적용할 수 없다는 그의 그림을 진정으로 이해하기까지
서양미술사는 400년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엘 그레코의 작품은 그만큼이나 현대적이지만
당시로는 너무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미래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