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폰토르모-DEPOSITION, Santa Felicita, Florence >
매너리즘이란 르네상스에서 바로크로 이해하는 과도기
이탈리아에 나타난 특이한 미술양식으로
원근법 왜곡, 복잡한 구성, 왜곡된 형태, 조화를 깨는 튀는 색채, 과장된 자세 등이 주된 특징이다.
이런 매너리즘을 이해하는 데 폰토르모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처럼 좋은 예도 없다.
제목과 달리 십자가는 아예 보이지 않고 뒤가 막힌 공간에 가득한 인물들이 답답해 보인다.
서로 맞물린 타원형 구도 안에 억지로 비튼 듯한 어색한 자세의 인체들이 서로 겹쳐져 있다.
특히 예수의 머리 주위에 뒤엉킨 손들은 구분하기 어렵다.
입이 모두 조금씩 벌어진 표정은 또 얼마나 야릇한지...
폰토르모(1494-1557)는 1494년 이탈리아의 소읍 폰토르모에서 지방 화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고장의 이름을 따서 사람들은 그를 본명 대신 폰토르모라고 불렀다.
그의 나이 다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1504년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떴다.
열 살에 그는 고아가 된 것이다.
1506년에 할아버지가 죽자 어린 폰토르모는 여동생과 함께 할머니 밑에서 자라며 읽기와 쓰기를 배웠다.
13세 되던 해에 그는 피렌체에 사는 먼 친척인 구두수선공의 집에 맡겨졌는데,
시골에서 살던 할머니와 여동생마저 곧 세상을 떠났다.
인생의 초창기에 너무나 많은 죽음을 겪었던 청년은 아주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화가로 성장한다.
포노토르모는 안드레아 델 사르토,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
피렌체의 유명한 화가들의 공방을 전전하며 그림을 배웠다.
그러다 한번은 제자의 재능을 질투한 스승 안드레아에 의해 화실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그는 결코 한 곳에 오래 머무는 사람이 못되었지만,
거처를 자주 옮기는 불안한 생활을 계속하면서 붓을 놓지 않았고
곧 사람들 눈에 띄었다.
미켈란젤로가 19세의 폰토르모가 세르비테 수도원에 그린 벽화를 보고
"이 소년이 장수하여 예술에 정진하다면 하늘에 이를 것이다."하고 칭찬했다고 한다.
폰토르모보다 19세 연상의 미켈란젤로는 젊은 화가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었고
두 사람은 죽을 때까지 서로를 깊이 존경했다.
둘 사이에 오간 우정의 증거로 <비너스와 큐피트>란 작품은
미켈란젤로의 밑그림을 폰토르모가 채색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미켈란젤로처럼 폰토르모도 평생 독신으로 살며 식사도 혼자 준비했고
옷차림 따위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서른 살이 지나 약간의 돈이 생기자 그는 근사한 저택 대신 탑 같은 피난처를 손수 지었다.
그의 침실이자 때때로 작업실로도 쓰는 방은 도르래로 끌어올리는
나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게 돼 있어 아무도 그의 허가 없이는 접근할 수 없었다.
이렇게 그의 그림은 드로잉에서 보이는 병적인 섬세함,
나른 하면서도 우울한 선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는 자연에서 벗어난 색채가 황홀하기까지 하다.
분홍과 파랑의 환상적인 농담 변화에 눈을 빼앗겨 '그리스도의 수난'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잊게 한다.
마치 화장한 것 같은 그리스도의 눈가,
슬픔으로 온통 파랗게 질린 성모 마리아의 옷섶을 지나
화면의 맨 앞에 엉거주춤 무릎 꿇고 앉은 천사에 멈추게 된다.
여태까지 머리로만 이해했던 매너리즘의 얼굴을 보게 된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아한 색채의 향연으로 바꿔 놓은 것은 화가 폰토르모이다.
어렵게 습득한 조화와 균형을 일부러 깨면서 그가 추구했던 건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그의 분열된 자아가 자연을 왜곡시켰던 것이다.
피렌체 매너리즘의 유일한 걸작이라는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는
화가가 자신의 보이지 않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고군분투하다 피운 모순의 꽃이다.
고통을 아름답게 승화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최영미의 <화가의 우연한 시선>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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