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 모음/그림이야기 50

한국인-루벤스

루벤스는 이 드로잉을 회화제작을 위한 습작이 아니라 독립적인 완성작으로 제작했던 것 같다. 루벤스가 앤트워프에서 어떻게 이 한국인과 접촉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루벤스는 그림속의 주인공이 먼 곳에서 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작은 배도 하나 그렸다. 하지만 루벤스는 배경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것보다는 인물과 그의 의상에 훨씬 더 관심이 있었다. 이 드로잉은 루벤스가 매우 꼼꼼히 그린 초상화중의 하나인데 얼굴에 빨강 분필로 터치를 함으로써 더욱 멋진 작품이 되었다. 실크에 퍼지는 빛의 효과에 매료된 루벤스는 검정 분필의 부드러움과 종이의 순백을 이용해서 주인공의 희미하게 반짝이는 의상을 표..

강세황

《송도기행첩 中 영통동구》 맑은 색감과 참신한 구도(構圖)뿐 아니라 색채의 농담으로 바위의 입체감을 표시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작품 강세황은 어려서부터 글과 그림에 재능이 뛰어나, 8세 때 시를 짓고, 13~14세의 나이에 쓴 글씨로 병풍을 만드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아버지의 사랑과 교육을 받았으며, 매형이었던 임정(任珽)의 영향도 크게 받았다. 처남 유경종 외에도 허필, 이수봉 등과 절친하게 지냈으며, 이익·강희언 등과도 교유하였다. 당대의 유명한 화가였던 김홍도, 신위 등도 그의 제자들이다. 벼슬에 뜻이 없어 젊은 시절에는 주로 작품활동에만 전념하였다. 32세 때 가난 때문에 안산(安山)으로 이주한 뒤에도 오랫동안 학문과 서화에만 전념하였다. 처음 벼슬을 한 것은 61세로, 영조의 배려에 힘입어 ..

밀레 - 만종

프랑스 화가. 그뤼시 출생. 가난했으나 신앙심이 깊고 애정이 넘치는 가정에서 자랐다. 어릴 때부터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1837년 파리로 가 P. 들라로슈의 제자가 되었다. 40년 살롱전에 출품한 초상화가 입선되었으나, 장학금 지급의 중단으로 생활이 어려워져 로코코풍의 나체화 등을 그려야 했다. 이 시기의 작품은 F. 부셰·J.H. 프라고나르풍(風)의 규방화(閨房畵)와 목가적인 주제를 많이 다루었다. 또한 부드러운 필촉과 명암의 대비가 특징이었다. 이러한 화풍은 주제가 농민화로 바뀐 뒤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49년 콜레라의 만연을 피해 가족과 함께 바르비종으로 이주하면서부터는 거의 모든 그림의 제재가 농민의 일하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밀레는 풍경적 요..

프레스코화

소석회(消石灰)에 모래를 섞은 모르타르를 벽면에 바르고 수분이 있는 동안 채색하여 완성하는 회화이다. 벽화화법 중 대표적인 것으로 기원전부터 로마인에 의해 그려져 왔다. 작품으로는 아시시의 치마부에, 파도바의 아레나예배당의 조토, 로마의 산타체칠리아성당의 카발리니의 작품 등이 오래된 것이며(13∼14기), 피렌체의 산마르코대성당의 프라 안젤리코의 명작이나 그 제자 고졸리에 의한 피사의 칸포산트의 작품 등이 유명하다(15세기). 또 아레초의 성프란체스코성당 본전(本殿)의 《성십자가 전설》은 15세기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걸작으로서 알려졌으며 피렌체의 카르멜회 교회의 브랑카치예배당에 그린 마사초도 르네상스양식을 확립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바티칸궁전에 있는 시스티나예배당의 벽화와 천장화는 미켈란젤로의 노년..

수채화

수채화가 회화양식으로 완전히 인정되기는 19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이다. 18세기 후반기부터 일부 미술작품 수집가들이 수채화나 소묘작품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일반사회에 번져가 급기야는 석판 인쇄기술의 발달과 함께 소묘나 수채화를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굳어졌다. 근세 미술에서의 수채화의 발달은 전적으로 19세기 영국의 풍경화가들 데이비드 콕스, 콘스터블, J.M.W.터너 등에 힘입고 있다. 이들의 수채화 작품은 영국 수채화의 전통을 확립하였고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와 그 이후의 서양미술 전반에 영향력이 큰 수채화작품들을 남겼다. 회화의 독자적인 표현양식으로서 자리를 굳힌 수채화는 영국뿐 아니라 프랑스에서도 들라크루아와 같은 낭만주의화가들에 의하여 이용되었고 인상파화가들에게도 받아들여져 마네 ·르누아르..

소묘素描(drawing)

프랑스어 데생의 역어이며 데생은 '그린다'는 뜻의 프랑스어 '데시네(dessiner)'에서 나온 말이다. 동양화의 묘법 가운데 선으로 윤곽을 나타내는 구륵법(鉤勒法)이나 먹의 농담으로 형태의 명암을 나타내는 몰골법(沒骨法) 같은 선묘법도 넓은 뜻의 소묘에 속한다. 소묘는 그리는 목적에 따라 첫째 인상의 파악, 세부의 기록, 건축·조각·회화작품의 계획이나 착상의 전개를 위한 스케치(크로키), 둘째 운동감·명암법·해부학 등의 회화적 표현의 탐구 및 표현기술의 훈련을 목적으로 하거나 그 완성작의 세부 또는 전체의 구도를 뚜렷이 나타내기 위한 습작, 셋째 벽화나 태피스트리 등의 원작을 만들기 위한 밑그림(카르통), 넷째 독립된 완성작품으로서의 소묘로 구별된다. 또 그리는 대상에 따라 석고소묘·인물..

다다이즘

전쟁은 인간의 가치관을 크게 변화시켰다. 인류 문명은 끊임없는 변화와 발전의 수레바퀴를 돌리며 더욱 편하고 아름답고 고귀한 위치로 전진 해왔지만 전쟁은 이 모든것을 외면하고 무시하고 파괴해 버렸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이후 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시달렸던 지구촌 곳곳의 예술세계는 그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아야만 했다. 급기야 전쟁이전의 인류를 찬양하고 보존하려했던 그 모든 문명의 결과와 정신은 부정하는 현상이 싹텃다. 그것이 다름아닌 다다[dada]였던 것이다. 다다라는 명칭은 1916영 2월 스위스 취리히에서 결성된 국제적인 전위예술가 그룹이 그들의 회합 장소인 카페 볼테르에 증축한 화랑을 위해 시인인 트리스탄 짜라가 선택한 것이었다. 사전에서 우연히 찾게된 '다다'라는 어원은 프랑스..

신 고전주의

고전주의는 고대 그리이스와 로마의 단정하고 우아한 양식을 모범으로 한 예술적인 경향과 운동을 가리킨다. 신 고전주의는 로코코의 경박한 취미에 반발하고 단순하면서도 전아한 기풍을 일으켰다. 회화상으로 다비드는 고전주의의 이상을 형식적, 내용적으로 순수하게 실현한 화가였으며. 나폴레옹과 왕립 미술원의 비호 속에 "나폴레옹1세의 대관식"등 영웅을 찬탄한 일련의 작품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나폴레옹 실각 후 다비드가 벨기에로 망명하고 나서, 소묘가 채색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한 앵그르는 섬세한 선과 균형 잡힌 인체 구도로 신고전주의의 후계자로 활약하기도 했으나, 점차로 형식주의에 빠져 개성이 상실되면서 낭만주의의 도전을 받게 된다. 그러나 훌륭한 초상화가인 앵그르는 외적 정확성 뿐만 아니라 모델의 내면적 깊이를 훌..

로코코

로코코 미술은1730년경부터 1770년경에 걸쳐 유럽에서 유행한 미술 양식으로 로코코란 조개 껍질형의 정원 장식물 "로카이유" 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원래는 귀족 사회의 공예품과 장식 양식에만 적용되다가 점차 미술 전반에까지 확대되어 사용하게 되었다. 복잡한 소용돌이, 당초 무늬, 꽃과 잎의 무늬 등 곡선 무늬에 담채와 금빛을 병용하는 것이 특징 이다 18세기 로코코 회화의 또 하나의 특징이라면 초상화가 많이 그려진 것을 들 수 있다 부유한 사람들은 자신의 초상화 그리는 것을 즐겨 했고. 로코코의 화려한 측면과 병행하여 일반 시민의 친숙한 모습을 간결한 수법으로 정확히 묘사 했던 샤르댕은 많은 이들의 호감을 샀다. 시민의 일상적 풍속화나 정물화에서 샤르뎅의 섬세한 실내 광선에, 대단한 감각을 엿볼 ..

르네상스

재생,부흥을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rinascita에서 유래했는데 우리말로는 문예부흥으로 번역되며,14세기 말부터 16세기에 걸쳐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전 유럽으로 확산된 미술.문예 또는 문화의 혁신운동 . 즉 중세의 교권주의에 입각한 카톨릭 교회 및 이와결부된 봉건제후들에 대항해서 상공시민 계급이 도시의 번성과 함께 차차 대두되어 데서 생겨난 운동 또는 그 성과이다.